치매는 대부분 서서히 진행되며, 초기에는 증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 ‘나이 탓’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놓치면 치료 시기를 늦추게 되고, 이후 치매 진행 속도를 조절하거나 생활 기능을 유지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치매 초기 증상을 빠르게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초기 치매는 단순한 건망증과는 다르며, 뇌 기능이 서서히 손상되면서 기억력, 성격, 판단력 등 다양한 영역에 이상이 나타납니다. 본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관찰되는 세 가지 초기 증상인 기억력 감퇴, 성격 변화, 판단력 저하에 대해 과학적 근거와 실제 사례 중심으로 깊이 있게 다뤄보겠습니다.
기억력 감퇴: 힌트로도 떠오르지 않는 ‘삶의 공백’
기억력 저하는 치매의 가장 대표적이고 첫 번째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건망증과는 그 본질이 다릅니다. 일반적인 건망증은 ‘어디 뒀더라’ 하다가도 결국 떠올리거나 힌트를 주면 회상이 가능합니다. 반면 초기 치매에서의 기억력 감퇴는 기억 자체가 뇌에 저장되지 않거나, 저장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한 건망증은 "어제 점심에 뭐 먹었지?"라고 물으면 잠시 고민 후 "아! 김치찌개였지" 하고 떠올릴 수 있지만, 초기 치매의 경우 "전혀 기억이 안 나"라며 힌트를 줘도 반응이 없거나, 전혀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단기기억 장애는 뇌의 해마(hippocampus) 기능 저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해마는 기억을 생성하고 저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먼저 손상되는 부위입니다. 초기 치매 환자에게서 다음과 같은 기억력 감퇴 패턴이 관찰됩니다.
초기 치매에서 보이는 기억력 감퇴 양상
1) 최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함
치매 초기에는 오래된 기억보다 최근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방금 식사한 내용을 잊거나, 대화를 나눈 후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중요한 약속이나 일정을 잊어버림
가족과의 약속이나 중요한 기념일, 병원 예약 등을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집니다. 메모를 해두어도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물건을 두고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림
안경, 지갑, 휴대전화 같은 일상 용품을 자주 분실하며, 원래 두었던 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냉장고 속에 TV 리모컨을 두는 등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4) 같은 질문을 반복함
치매 환자는 방금 했던 질문을 기억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묻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 먹었어?"라는 질문을 몇 분 간격으로 여러 번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억력 저하가 단기간에 눈에 띄게 나타나거나,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경우, 이는 치매 초기의 신호일 수 있으므로 조기 진료가 필요합니다. 미국 알츠하이머협회는 “최근 기억 상실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시작하면 반드시 전문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60세 이상 고령자 대상 MMSE 검사 등 선별검사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격 변화: 익숙했던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치매 초기에는 인지기능 저하뿐 아니라, 감정과 성격의 변화도 서서히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침착하고 온화하던 사람이 갑자기 예민해지거나,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과민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성격 변화는 뇌의 전두엽, 측두엽 기능 저하와 관련이 있습니다. 전두엽은 충동 조절, 사회적 판단, 감정 제어, 동기부여 등을 담당하는 부위로, 이 영역이 손상되면 충동 조절 장애, 무관심, 공격성, 판단력 저하 등이 나타납니다. 특히 전두측두엽 치매나 알츠하이머병 초기에는 이러한 성격 변화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감지되는 단서가 되곤 합니다.
초기 치매에서 나타나는 성격 변화 예시
- 쉽게 짜증을 내고, 사소한 일에 격하게 반응
- 평소와 다르게 우울하고 의욕이 떨어짐
- 사회적 예절이나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음
- 활동을 회피하고 집에만 있으려 함
- 집중력 저하로 인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음
이러한 변화는 환자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 가족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말이 거칠어지고, 의심이 많아졌다"는 식으로 먼저 인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가족의 세심한 관찰이 매우 중요하며, 변화가 지속된다면 전문 의료기관의 평가가 필요합니다.
주의할 점
- 우울증, 폐경기 증상, 갑상선 기능 저하 등과도 유사하므로 감별이 필요함
- 성격 변화가 심할 경우 뇌영상(MRI, CT)이나 심리검사 병행 추천
- 감정 변화는 치매 초기 단계부터 심리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조기 상담 권장
초기 치매는 단지 기억을 잊는 것이 아니라, ‘나답던 모습’을 잃어가는 병입니다. 말투가 변하고, 감정 표현이 달라졌다면 그 안에 감춰진 뇌의 변화를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판단력 저하: 익숙한 일상 속 실수가 잦아질 때
치매 초기에는 문제 해결 능력과 판단력이 점차 저하됩니다. 이는 단순한 건망증과도 다르고, 실수의 문제도 아닙니다. 복잡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일에도 결정 장애가 생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냉장고에 국을 넣어야 할지, 상온에 둬야 할지 몰라 고민하거나, 지하철을 탔는데 목적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등의 사례가 있습니다. 금융, 교통, 약물 복용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 능력이 손상되며, 때로는 사기를 당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판단력 저하는 뇌의 전두엽 기능 저하와 관련되며, 특히 감정 조절, 추론, 미래 예측, 순서 구성 능력이 손상됩니다. 따라서 “말은 멀쩡한데 이상한 결정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리는 경우, 조기 평가가 필요합니다.
초기 치매의 판단력 저하 사례
- 약을 제때 복용하지 않거나, 중복 복용함
- 금융사기나 불필요한 물건 구매, 이상한 계약에 서명
- 장을 보면서 필요한 것보다 엉뚱한 물건을 사거나 과소비
-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보지 않고 건너거나, 교통 규칙을 무시함
이러한 판단력 저하는 환자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지하기 때문에, 초기에 불안, 무력감, 자신감 상실로 이어지며 우울증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족이나 보호자는 환자가 ‘실수’를 했을 때 무조건적으로 질책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면서 병원을 연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판단력 저하가 뚜렷한 경우는 일반 치매가 아닌 루이소체 치매, 전두측두엽 치매와 같은 특정 유형의 치매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감별 진단이 필요합니다.
결론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초기 치매’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징후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그 신호를 빨리 읽어내는 것이 질병의 진행을 늦추고 삶의 질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 기억력 감퇴: 반복 질문, 단기 기억 상실, 힌트로도 회상 어려움
- 성격 변화: 감정 기복, 무기력, 충동성 증가
- 판단력 저하: 일상 속 실수, 의사결정 오류, 순서 혼란
이러한 증상이 하나라도 반복되고 지속된다면, 나이 때문이라며 방치하지 말고 반드시 전문 기관의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매는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 효과도 크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작은 관심이, 미래의 기억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